말하는 것은 언제나 좋은 것일까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많은 철학자들이 '정신(이성)'의 중요성을 이야기할 때, 비트겐슈타인은 정작 중요한 것은 인간의 언어임을 주장했죠.
철학은 말할 수 있는 것을 명료하게 묘사함으로써, 말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 논고>
p173
비트겐슈타인에게 철학은 먼저 '말할 수 있는 것'을 명료하게 하는 일이었어요.
하지만 그것(말할 수 있는 것)은 도구일 뿐이죠.
'말할 수 있는 것'을 명료하게 해 진정으로 도달하려던 지점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었어요.
마치 '빛(말할 수 있는 것)'을 비춰 '그림자'를 드러내는 것처럼 말이에요.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은 왜 굳이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려 했을까요?
오해 없는 완벽한 의사소통을 위해서였어요.
우리는 말을 해요. 하지만 그럼에도 온전한 의사소통은커녕 서로 오해만 쌓이는 경우가 많죠.
'오늘 같이 축구하자.'라는 친구의 말에 '오늘은 집에 일찍 갈래.'라고 답했어요.
나는 그저 피곤해서 그렇게 답했을 뿐인데, 친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죠. '쟤는 나를 싫어하는구나.'
이처럼 말이 오가도 온전한 의사소통이 되기보다 크고 작은 오해가 생기는 경우가 많아요.
그는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완벽히 구분함으로써, 어떤 오해도 없는 완벽한 의사소통이 가능한 세상을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에요.
그림이론
그는 기본적으로 '언어는 세계를 표현하는 그림'이라고 생각했어요. 이것을 그림이론이라고 해요.
세상의 수많은 구체적인 사물에 그림처럼 대응할 수 있는 언어만이 말할 수 있는 것이라는 거죠.
비트겐슈타인은 자연 과학이나 수학적인 언어들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규정했어요.
자연 과학적, 수학적인 언어는 <그림처럼 그릴 수 있는> 명확한 대상이 있기 때문이죠.
이런 언어는 누구에게나 오해 없이 명확하게 전달될 수 있겠죠.
반면에 윤리적인 것, 종교적인 것, 개인적 취향, 정서 상태 등 인간의 내면에 관련된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이에요.
이런 것들은 명확한 대상이 없기 때문에 오해 없는 명확한 의사소통이 불가능하죠.
말할 수 있는 것 | 여름이 되면 더워질 거야 (자연 과학적인 표현) |
그 학원은 30미터 직진하셔서 좌회전하면 있어요(수학적인 표현) | |
말할 수 없는 것 | 게임 중에는 브롤스타즈보다 재미있는 건 없어.(개인적 취향) |
나 어제 멘붕 왔잖아.(정서 상태) |
말해질 수 있는 것, 그러므로 자연 과학의 명제들 (중략)
이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말고, 다른 어떤 사람이 형이상학적인 어떤 것을 말하려고 할 때는 언제나 그가 그의 명제들 속에 있는 어떤 기호들에다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못하였음을 입증해 주는 것. 이것이 올바른 방법일 것이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 논고>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있는 것' 즉 자연 과학 혹은 수학적인 말들 이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말라고 해요.
또한 누군가 그림처럼 명확하게 표현될 수 없는 것(윤리, 종교, 취향, 정서 상태)을 말하려고 할 때, 우리가 그것이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음을 입증해야 한다고 말해요.
비트겐슈타인은 이것이 언어(말, 글)를 대하는 올바른 태도라고 단언합니다.
그 올바른 태도를 유지할 때만 어떤 오해도 없는 완벽한 의사소통이 가능해지니까 말이에요.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논리- 철학논고>
침묵하면 행동하게 돼요. 말할 수 없어서 침묵했고, 말할 수 없었던 마음이 행동으로 배어 나오기 때문이죠.
어쩌면 우리가 행동하지 않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너무 쉽게 말해 버렸기 때문이 아닐까요?
'미안해' , '고마워' , '사랑해'라고 너무 쉽게 말해 버려서 또 약속 시간에 늦고 정성스러운 선물을 준비하지 않고 밤새 병간호를 하지 않게 된 것은 아닐까요?
말할 수 없는 것은 오직 침묵만으로만 말할 수 있어요.
행동은 침묵의 다른 이름인 셈이죠.
우리는 침묵으로써 오히려 더 많은 것들을 말할 수 있는 근사한 사람이 될 수 있어요.
★함께하면 좋은 글★